예전 초등학교에는 이승복 동상과 함께 더불어, 체력은 국력이라 적힌 동상이 있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한쪽 손에 횃불을 들고 앞으로 전진하는 형상인데, 이는 아마도 올림픽의 성화봉송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많게는 70여 년의 시간 동안 동상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지금과는 다른 그 시절의 교육이념을 머금은 채, 어떠한 보살핌도 없이 그 자리에 버려져 있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동상들에 대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그리 곱지 않다. 너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강요하는 부분이 동상에 녹여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각지에서 남성중심적이고 식민지주의 적인 백인우월주의적인 동상들이 일부 단체들에 의해 허물어지거나 더 이상 광장과 같은 공공의 공간에 이러한 동상들을 놓는 것을 지양하는 분위기이다. 현재의 가치와 맞지 않는 이러한 동상들은 그럼 어떻게 될까? 대부분은 박물관으로 귀속된다고 한다. 박물관은 현시대에 더 이상 이념적으로 기능하지 못하지만 역사적인 가치만큼은 남아있는 물건들을 담아내기에 유용한 곳이다. 하지만 박물관에도 귀속되지 못하는 동상들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이다. 정치가 끼어들게 되면 아무리 역사적인 물건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갈 곳을 잃게 된다. 폐교에 버려진 동상들처럼, 더 이상 담아낼 이념도 혹은 지켜야 할 가치도 없는 것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재미있게도 그들은 더욱 강력한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부만 하던 우등생이 모두를 실망시켜서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느낌?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자유로움? 동상이 아닌 진정한 조각작품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이전과 다르다. 그 동상을 구성하는 것이 이미지가 전부였다면 이번에는 그 동상의 존재론적 본질인 재료(금속)에 기반을 두고 있다. 관념론과 유물론을 빗대어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는 어떤 대상의 존재를 특정한 센서를 통해 인지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관념이라는 창을 통해, 혹은 그것이 원래 존재하고 있는 물질 그 자체로 인지하기 마련이다. 내가 만들어내는 동상은 관념론보다는 유물론에 더욱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나는 동상을 실제 전파를 받아들이거나 송신하는 안테나로 이용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금속이라는 물질이기에 실제로 기능하는 물질적 속성은 기존의 관념론적 조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송출하는 전파는 그 동상의 존재와 관련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반 라디오와 같은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파를 송출하고 있는 행위 자체로서 안테나로서의 동상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송출하는 전파가 무엇이든 그것이 가리키거나 돌아보게 하는 것은 동상 그 자체이다. 동상이 송출하는 전파는 그 특성상 보이거나 만져지거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 라디오가 있다면 들을수 있다. 그것은 때때로 아무것도 없는 무음일수도 있고, 부스럭거리는 소리, 혹은 잡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그것이 전파로 전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 전파를 송출하고 있다는 그 행위 자체가 이 작업에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