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3 August 2023

체력은 국력

예전 초등학교에는 이승복 동상과 함께 더불어, 체력은 국력이라 적힌 동상이 있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한쪽 손에 횃불을 들고 앞으로 전진하는 형상인데, 이는 아마도 올림픽의 성화봉송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많게는 70여 년의 시간 동안 동상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지금과는 다른 그 시절의 교육이념을 머금은 채, 어떠한 보살핌도 없이 그 자리에 버려져 있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동상들에 대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그리 곱지 않다. 너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강요하는 부분이 동상에 녹여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각지에서 남성중심적이고 식민지주의 적인 백인우월주의적인 동상들이 일부 단체들에 의해 허물어지거나 더 이상 광장과 같은 공공의 공간에 이러한 동상들을 놓는 것을 지양하는 분위기이다. 현재의 가치와 맞지 않는 이러한 동상들은 그럼 어떻게 될까? 대부분은 박물관으로 귀속된다고 한다. 박물관은 현시대에 더 이상 이념적으로 기능하지 못하지만 역사적인 가치만큼은 남아있는 물건들을 담아내기에 유용한 곳이다. 하지만 박물관에도 귀속되지 못하는 동상들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이다. 정치가 끼어들게 되면 아무리 역사적인 물건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갈 곳을 잃게 된다. 폐교에 버려진 동상들처럼, 더 이상 담아낼 이념도 혹은 지켜야 할 가치도 없는 것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재미있게도 그들은 더욱 강력한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부만 하던 우등생이 모두를 실망시켜서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느낌?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자유로움? 동상이 아닌 진정한 조각작품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이전과 다르다. 그 동상을 구성하는 것이 이미지가 전부였다면 이번에는 그 동상의 존재론적 본질인 재료(금속)에 기반을 두고 있다. 관념론과 유물론을 빗대어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는 어떤 대상의 존재를 특정한 센서를 통해 인지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관념이라는 창을 통해, 혹은 그것이 원래 존재하고 있는 물질 그 자체로 인지하기 마련이다. 내가 만들어내는 동상은 관념론보다는 유물론에 더욱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나는 동상을 실제 전파를 받아들이거나 송신하는 안테나로 이용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금속이라는 물질이기에 실제로 기능하는 물질적 속성은 기존의 관념론적 조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송출하는 전파는 그 동상의 존재와 관련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반 라디오와 같은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파를 송출하고 있는 행위 자체로서 안테나로서의 동상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송출하는 전파가 무엇이든 그것이 가리키거나 돌아보게 하는 것은 동상 그 자체이다. 동상이 송출하는 전파는 그 특성상 보이거나 만져지거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 라디오가 있다면 들을수 있다. 그것은 때때로 아무것도 없는 무음일수도 있고, 부스럭거리는 소리, 혹은 잡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그것이 전파로 전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 전파를 송출하고 있다는 그 행위 자체가 이 작업에서 중요하다.

Sunday 8 September 2019

나무에 대한 글

내가 나무라면
나는 수직의 운명에 목이라도 맨듯
좌우로 한치의 오차도 두지 않고
똑바로 선 자세로 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선 그대가 오는 길목이 잘 보이도록
약간 높은 언덕을 고르고
그 언덕 위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올 때마다
그대의 발자국 소리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 마음을 따라 몸을 기울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직립의 자세를 버리고
그대가 오는 곳으로 기울어져 자라는 나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몸을 기울이진 않을 것이다.
몸을 너무 기울이면
그대를 기다린다기보다
그대를 노골적으로 탐하는 자세가 되고 만다.
그러면 그대에 대한 내 마음이 바깥으로 쏟아진다.
마음이 바깥으로 쏟아지고 나면
그대의 발길이 내 마음으로 어지럽혀지고 만다.
알고 보면 마음이 쏟아질 때
그대도 함께 쏟아져 버린다.
그러니 나는 마음이 쏟아지지 않을 만큼
약간만 몸을 기울일 것이다.
그대가 어느 곳을 걸어가다
그대를 향하여 아주 약간 기울어진 언덕 위의 나무를 만났다면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그대를 향하여 기울어진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은 그대를 향하여 쏟아지진 않으나
그대가 주는 눈길로
조금 덜어낼 수 있을 만큼 기울어져 있을 것이다.

Friday 2 November 2018

If you hurt me. well that's ok. Only word bleeds.

우울한 날들이 다쓴 것 같은데 아직도 남은 휴지 두루마기처럼 질질 계속 된다. 뭐든 하면 할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부족했던지 방법이 잘못된건지 아무튼 안되는 것 같다. 실패도 계속 반복되면 길들여 진다는데 이러다가 정말 발목묶여 길러진 코끼리처럼 결국 방생되어도 자유롭게 떠나지 못하게 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진짜 짜증나는 건 이렇게 만든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Monday 3 July 2017

휴 오랜만이다 진짜..

나는 우리가 평소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만..사실 그렇지 않은 것들 혹은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령 정신과 물질, 자연과 인간, 종교와 과학 처럼 오랜시간에 걸쳐 이원론적 사고를 통해 받아들여졌던 것들 말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과학의 발전을 이룩한 서양근대철학에 근간을 둔 한편, 일원론적 사고는 어찌보면 동양철학과 연관이 깊다. 동양철학에서 인간과 하늘은 서로 연결되어 반응한다는 '천인감응사상'만 보더라도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 그리고 종교와 과학의 경계가 매우 희미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두가지의 다른 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서로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특히 현재의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원론적 사고에 작은 경종을 울린다. 난 나의 작업을 통해 결코 연결될 수 없었던 다른 두가지의 대상을 연결시키거나 사실 연결되어왔음을 얘기한다. 나에게 있어서 연결됨은 치유이고, 그 치유는 예술가로써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역할과 기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Friday 30 June 2017

그냥 쓰자

뭐 딱히 어떤 목적을 가지지 말고.. 그냥 쓰면 된다. 해야할일을 많이 했다. 그래도 준비가 약 80퍼센트 이상 된것 같다. 지난 4년동안 생각만 해왔던 일들을 해보려 한다. 어느정도의 타협이 있을것 같긴 한데.. 타협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그런 타협이 내 작업을 많이 희석시켰으니까. 뭔가를 하려면 항상 이유를 찾곤 했다. 마치 과업을 수행하듯이.. 근데 그건 아닌 것 같다. 항상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하면서 정작 나 스스로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냥 자유롭게 작업하자. 이것저것 해보고 안되면 안되는 거고..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냥 의미 없는게 맞는 것 같다. 이러다가 잠에서 안깨어나듯이 죽는 거겠지. 그렇다면 죽기전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잘 모르겠다. 그냥 이것 저것 해보면서 알게 되겠지.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거 하고 싶은데 그게 뭘까? 내 작업? 재미있는 단계가 있긴 한데... 그걸 넘어서면 사실 그닥 재미가 없다. 그럼 좀더 어려운 걸 해볼까?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재미가 있으니까? 나에게 있어서 어려운 건 뭘까?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것? 돈이 많아 지는 것? 이것도 사실 별로 안땡긴다고 해야하나.. 어차피 한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어려운 일이지? 뭔가 흥분되는 일이 뭘까? 내 작업에 대한 약속지키기? Is of 시리즈의 완벽한 실현, 촛불발전기의 완벽한 실현, 안테나작업의 완벽한 실현, 바셀린 작업에 대한 완벽한 실현, 기우제실현? Read River의 실현 등등.. 실험처럼 끝났던 프로젝트들을 완벽하게 실현시키는 것? 작품으로써 그리고 소유할 수 있도록? 혹은... 무엇이 있을까? 세상이 깜짝놀랄, 내용이 깊고 아름다우며 가볍고 (내가 핸들링할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소유할 수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 설치작품의 새로운 형식?

Thursday 28 January 2016

기우제의

의미는 갈라진 균열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과 합침 그리고 치유를 상징하는데, 그건 3개의 아이패드 촛불로 보여지겠지. 근데 그 아이패드 촛불은 한편으로는 이미지만 소비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해. 경험이 아닌 미디어에 현혹되어 자신의 생각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의미는 있다. 그것이 단지 가상의 촛불이라도 우리는 마음에 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촛불은 기우제라는 나의 작품을 통해 실현되는데, 이 기우제는 악해독단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악해독단은 오방토룡제가 이루어졌던 남쪽에 위치한 제단으로써 근대화시기를 거치면서 철거되고 사라졌다. 2000년대 초반에 발견된 남단터의 모습은 근대화를 상징하는 빨간벽돌로 만들어진 바베큐그릴의 받침대로 이용되고 있었고, 나는 그러한 모습에서 근대화가 지닌 변화의 이면성을 발견했다. 중간이 툭 떨어져 나간 듯한 우리의 근대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악해독단에서 이루어졌던 기우제를 나만의 방식으로 재현함으로써, 악해독단을 치유하고 기우제가 가진 의미를 되살린다. 작품에서 근대화를 상징하는 빨간벽돌과 물을 상징하는 바셀린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은 새롭게 진행되는 기우제의 치유의 제단이다. 이 제단에서 이루어지는 기우제는 악해독단에서 이루어졌던 토룡기우제를 모방한다. 토룡기우란 흙으로 용의 형상을 만들고 물을 뿌리던 기우제이다. 용은 본래 물의 신이고 용에 물을 뿌리는 행위는 용의 힘을 강하게 함으로써 비를 부르는 기우제이다. 나는 토룡을 재현하고 물을 뿌리는데 그 결과물은 실제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는 흙속의 이온이 물에 적셔졌을때 활성화되고 그 이온을 서로 다른 금속을 이용해 만든 전기에너지이며, 이것은 최초의 건전지인 볼타전지의 원리이다. 관념적으로는 흙으로 만든 용의 물의 기운을 강하게 만드는 주술적 행위이지만, 나는 실제로 물과 흙의 조합으로 실제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전기는 3개의 아이패드를 충전시키고 촛불 앱을 작동시킨다. 즉, 기우제가 가진 의미, 마치 메마른 땅이 갈라지듯이, 균열되고 분열된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다시 하나로 합치고 부드럽게 만드는 의미로써 촛불을 밝히는 것이다. 촛불이 세개인 이유도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가 아닌, 즉 2개가 아닌 1개 더 즉 3개의 균형을 상징한다. 




Wednesday 27 January 2016

점점

낫고 있다. 바닥을 찍은 만큼 이제 더 내려갈 일은 없겠지. 그래도 두려움은 흉터처럼 남았다. 그 두려움이 다시 올까봐 또 두렵지만 그래도 힘내서 다시 일어나야지. 슬픔, 두려움, 걱정, 수치심 등등 모두 오래 머물지 않으니 호연하게 기다리면 지나가는 것 같다. 반대로 즐거움, 행복도 오래 머물지 않으니 집착해봐야 소용없는 것 같다. 내가 기분 좋은 일을 하되, 나의 경험과 생각들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나와 사회에 동시에 공헌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나만 좋자고 이 일을 하는 건 아니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건..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을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자유롭게 사고의 흐름에 맞기고 행복하게 기분좋게 받아들이고 뛰어들자. 작품의 아이디어는 절대로 계산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런걸 믿었던 내가 바보지..